점점 더 많은 기업에서 다양한 전공을 가진 디자인팀을 꾸리고 있습니다. ‘다학제적 디자인’이라는 어색한 단어로 번역되는 Multidisciplinary Design은 경제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다학제적 접근이 가진 중요한 가치는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를 해결하면 유의미한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요. 과거 디자인이 시각 디자인, 제품 디자인, 패션 디자인과 같이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에 머물렀다면 ‘다학제적’ 접근은 심리학, 경제학, 철학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으로 시야를 확장합니다.
‘다학제적 디자인’이 등장한 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에서 해결해야 하는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등장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디자인’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감각적 자극뿐만 아니라 ‘기억’과 ‘판단’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스탠포드 D. School, 카네기 멜론 MPD(Master Product Development), MIT Media Lab, 핀란드 알토대 IDBM(International Design Business Management Program) 등에서는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더 포괄적인 디자인 교육을 시행하면서 학문적 영역을 넘나들고 있죠.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하며 학문적 영역을 넘나들고 행동경제학이란 개념을 제안해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대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좋은 디자인에 대해 여러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판단, 의사결정을 할 때 얼마나 비합리적일 수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경제활동을 하는지를 분석하고 들여다보는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입니다. 기존에는 ‘인간은 이성적인 노력으로 최대한 똑똑한 결정을 내린다’는 전제를 가지고 현상을 이해하려고 했죠.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며 밝힌 소감에는 행동경제학에서 보는 인간의 비합리성이 잘 드러나있습니다.
저는 고정관념에 기초한 인간의 두루뭉술한 사고와 편향성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인간이 모두 비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저는 ‘합리성’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뿐입니다.
Daniel Kahneman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주관에 휘둘려 충동적이며, 집단적으로 똑같이 행동하며 자신을 과신하거나 편향에 빠집니다. 인간이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따라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한다는 거죠. 그가 해 온 상식의 실험들은 단편적으로 이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에게 ‘90% 무지방’과 ‘지방 함유 10%’ 중 하나를 고르라고 요구하면 대부분은 ‘90% 무지방’을 고르는데요. 똑같은 의미지만 ‘90% 무지방’이 더 긍정적이라고 인식하는 겁니다. 이를 틀(framing) 효과라고 부르죠.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과학전시관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기름유출에 피해를 본 새들을 구하기 위해 5달러를 기부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방문객들은 평균 20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 기부금액을 400달러로 높여 보니 평균 기부금액은 143달러로 확 늘어났죠. 질문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겁니다.
그가 연구한 행동경제학의 연구결과를 좋은 디자인에 적용하려면 인간이 쉽게 빠지는 함정을 고려해야 합니다. 즉흥적이고 단시간 내에 사고하고 결정하면 ‘당신이 보는 게 세상의 전부(WYSTI-What You See is all There Is)’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죠. 스스로를 너무 믿고 낙관주의에 빠집니다. 직관적인 사고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틀을 사실이라고 믿게 만들고 자신을 부정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는 ‘기억 자아(remembering self)’와 ‘경험 자아(experiencing self)’라는 두 가지 자아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의 경험을 다양하게 분석하고 이를 공부해서 판단하지 않고, 기억 자아에만 의존해 내가 하고 싶은 방향대로 기억을 왜곡하고 이를 틀로 삼아 미래를 예상하죠. 경험과 기억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충분히 고민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겁니다. 이에 따르면 행복과 불행은 경험이 아닌 기억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기억은 처음과 마지막 순간에 강력하게 형성되어 오랜 시간 지속됩니다.
대부분의 디자인은 이제 플랫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스포티파이, 넷플릭스. 어떤 사용자도 새로운 앱(App)을 다운로드하고 이용을 시작할 때, 중독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지 않습니다. 무한 스크롤 피드를 통해 다른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고 수면시간이 줄어들고 일상에 지장을 미치게 되도록 서비스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행동경제학에서 분석한 내용을 비윤리적으로 이용하면, 인간은 처음과 마지막 순간에 강력한 기억을 형성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므로 실제 경험한 것과 다른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장치를 설계할 수도 있으니까요. 사용자의 인식과 평가는 실제 경험한 총량과 별개로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이를 의도적으로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다른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사용자는 서비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될 겁니다. 예상하지 못한 불안감과 우울감도 한꺼번에 밀려올 테죠. 그때 디자이너는 사용자를 탓하고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사용자의 경험을 만드는 것은 디자이너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