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멘토링을 해 준 선배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보고 저기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올 가을, 라오스에 다녀왔다. 핑계는 좋았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여름휴가였다.
전 세계에 몇 남지 않은 공산국가 라오스의 공식명칭은 ‘라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lic)’이다. 지구상에 남은 공산국가 대부분이 그렇듯, 라오스 역시 수 년전부터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산업인프라가 없는 국가에서 이미 가진 것으로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 관광업으로 말이다.
뉴욕타임즈에서 2008년 세계에서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 1순위로 라오스를 꼽은 이후 이곳을 찾는 이방인의 발걸음이 잦아졌다.한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작년부터는 진에어에서 인천-비엔티엔 직항노선을 운행하기 시작했다.나는 수도인 비엔티엔을 거쳐 국내선을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갔다. 도시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원의 도시 루앙프라방.
라오스 인구의 90% 이상이 불교 신자라고 한다.라오스의 불교 신도 중 남자는 보통 20살이 되기 전 1주일에서 3개월 정도 절에서 승려로 지내는 시간을 갖는다.견습 중인 승려에게는 기독교처럼 지켜야 하는 10개의 계율이 있다.

- 도둑질 안 하기
- 거짓말 안 한기
- 살인 안 하기
- 마약 및 성생활 안 하기
- 오후 금식하기
- 음악을 듣거나 춤추지 않기
- 보석이나 향수 안 하기
- 높은 침대 안 쓰기
- 개인 용도로 돈 받지 않기 등이다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계율이 227개라고 하니, 이곳에서 승려가 존경받는 이유는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운이 좋게도 관광객의 눈으로 승려에 대한 현지인의 존경을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약 20분 남짓한 그 시간을 ‘탁밧’이라 부른다. 탁밧은 수행자들이 지켜야 하는 중요한 규율 중 하나로 음식을 공양받는다는 뜻이다.
승려들이 번화가로 나오는 이 특별한 시간, 승려들의 긴 행렬을 마주하는 것은 무릎을 꿇고 그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신도들이다.이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은 신도들보다 더 많이 거리에 나와 셔터를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양을 받은 승려들은 염불로 답례한 후, 사원으로 돌아간다. 먼저 불단에 공양을 드리고 거리에 있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 다음 사원에서 기르는 개와 고양이 등에게 나눠준다. 그리고 남은 것을 비로소 승려들이 아침으로 먹는다. 이국적인 배경, 이색적인 모습이 이목을 끌기 충분했고 다른 관광객들과 경쟁하듯 나는 사진에 그들의 경건한 모습을 기계적으로 담았다.
루앙프라방은 새벽녁부터 거리는 탁밧을 하기 위한 현지인들과 여행객들로 경건한 활기가 넘쳤다.그런데 그 사이로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긴 탁밧행렬 속의 아이는 스님 사이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래야 스님에게 더 많은 음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루앙프라방에서는 이렇게 매일 아침 음식을 서로 나눈다고 한다. ‘구걸’이 아닌 ’나눔’이다.아이들이 일찍부터 내려와서 기다린 끝에 승려들에게 받은 음식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다.바구니를 집에 가져가서 가족들과 함께 나눈다. 온 가족이 먹을 음식을 마련해가는 이 아이들이 가장인 셈이다.
승려들의 행렬이 시야에서 멀어졌다.모처럼 일찍 일어났는데 다시 잠을 청하기는 싫었다. 대신 숙소 앞을 지나는 강을 보기로 했다.잠시 후 두 사람이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강둑에 앉았다. 7살 정도 되었을까 싶은 언니와 두 살 터울 정도의 동생으로 보였다.언니는 건너편 멀리 가리키며 속삭였다. “너가 조금 더 크면 언니가 저기에 데려갈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매의 모습을 오래 남기고 싶었다. 사진을 찍으려다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라오어로 인사를 건네자 미소로 답하는 동생은 아침을 먹으려는 듯 했다. 바구니 속에서 주섬주섬 파란 뭉치를 꺼내더니 작은 손으로 조금씩 입에 넣었다. 입을 오물거리는 동생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동생은 언니에게 말하고는 파란 잎 뭉치 두 개를 꺼내 다가왔다. 아무 말 없이 내게 그 뭉치를 내밀었다. 제자리로 돌아간 동생을 바라보다 나는 그 뭉치를 열었다. 바나나밥. 바나나 잎에 쌓인 바나나밥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지라 허기가 졌던 나는 한 입 베어물었다. 설탕을 뿌린 것 같은 아주 달콤한 밥이 맛있었다. 조금 더 떼어내어 입 안으로 넣었다.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 내가 가진 것,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숙소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가나초콜릿이 있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 냉장고에서 적당히 딱딱해진 초콜릿을 꺼냈다. 혹시나 자매가 떠날까 서둘렀다. 자매는 자리에 있었다. 초콜릿을 주며, 이게 내 마음이라고 했다. 그들은 별 감흥없이 고맙다고 했다. 순수한 자매의 미소처럼 꾸밈없는 바나나밥에 대한 내 보답은 검정비닐에 싸인 천원짜리 딱딱하고 차가운 초콜릿이었다. 나는 처음 강을 보던 자리로 돌아가서 바나나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자매가 바구니를 자전거에 싣더니 손을 흔들며 인사를 보냈다.
나는 홀로 남아 아침 탁발 행렬에 찍은 사진을 살폈다. 그러다 웅크리고 앉아있는 자매를 다시 만났다. 승려들에게 공양을 하는 신도들 옆에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받는 아이들 속에 자매도 있었던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신도들, 수련하는 승려들, 그들이 공양받은 음식을 받기 위해 아침 일찍 나온 아이들. 그 모든 것을 이방인이란 이유로 카메라에 여유있게 담아내는 관광객. 내가 그 관광객이었는데 신도가 승려에게 주고 승려가 다시 아이에게 나누어 준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시야에서 자매의 자전거는 저 멀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