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다양한 종류의 기록을 합니다. 저는 디자이너에게 기록의 습관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믿는 편입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요. 먼저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합니다.
- 디자이너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입니다.
- 디자이너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는 영감의 주체입니다.
먼저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서 디자이너의 역할을 정의하고 기록이 갖는 힘을 들여다보겠습니다. 기록을 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휘발되기 쉬운 아이디어를 보존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기록된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해관계가 맞는 상대와는 공감, 교감할 수 있는 원재료가 됩니다. 디자이너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가 있습니다. 이 절차들을 관통하는 것이 공감, 교감입니다.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Double Diamond Model)은 영국디자인협의회(Design Council)가 디자인 프로세스를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한 방법론으로 확산과 수렴을 반복하는 프로세스라 그래프 모양이 두 개의 다이아몬드처럼 보입니다. 서비스 디자인, 경험 디자인에서 이야기하는 디자이너의 문제해결 방법론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Double Diamond Model)]
➊ 발견하기(Discover)
데스크 리서치, 설문조사, 심층 인터뷰, 관찰 등을 통해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 문제를 발견하는 단계
➋ 정의하기(Define)
주요 문제점이 발생하는 서비스 점점(Touch Point)을 찾아 서비스 방향성을 도출하는 단계
➌ 개발하기(Develop)
발견한 사용자 요구를 기반으로 아이디어 개발 및 디자인 콘셉트를 도출하여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단계
➍ 전달하기(Deliver)
서비스 프로토타입을 사용하여 사용자에게 평가받고 의견을 수렴해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평가 결과를 문서화하는 단계
각 단계에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생각을 기록하는 겁니다. 기록을 해야 오류 없이 공유할 수 있고 새로운 이해관계자가 합류했을 때에도 이를 비용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자로서 디자이너는 문제를 찾아내고, 본질을 꿰뚫고 이를 정의해야 하며 정해진 자원 내에서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심미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이해관계자에게 우아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기록입니다. 영국의 외교관이자 역사학자였던 에드워드 핼릿 카는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거듭 회자되는 역사에 대한 유명한 정의가 갖는 메시지는 기록이 갖는 성격 중 주관성, 해석의 여지입니다. 완벽히 객관적인 기록의 역사란 존재할 수 없으며 인식의 재구성을 통해 취사선택된 내용에는 이미 ‘과거에 대한 사실(a fact about the past)’ 자체가 ‘역사의 사실(a fact of history)’가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죠. 디자이너가 기록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 표면과 근본을 구분하고 있느냐,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고 문제해결을 위한 자원 배분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냐 등의 판단이 생물처럼 개입될 수 밖에 없죠. 그래서 평소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이를 공유하며 자신이 의도한 바와 같이 공감, 교감을 가져오는지 연습하고 테스트해서 개선해야만 합니다.
디자이너가 내놓은 해결책에는 디자이너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하고, 그 생각이 사용성, 심미성, 공공성에서 부족함 없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때에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이 완성됩니다.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기록입니다. 과학적인 기록일 필요도 없습니다. 순전히 주관적인 기록인 동시에 정보 전달을 위해 유의미한 속성을 온전히 포함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담아내는 ‘-다움’의 글이면 충분합니다. ‘-다움’이 가득한 글은 곧 디자인 기획이자 콘셉트가 되고 쌓인 후에는 세계관이 됩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두려웠던 것이 어느새 익숙해지고 또 무료해집니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떨릴 때 기록하고, 매번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처음의 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낯선 기분이 무료해지지 않고 두려움에 익숙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기록입니다.
디자이너는 다양한 종류의 일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디자인은 보이는 것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라는 명제는 점점 사라지고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정으로서 디자인’에 대한 업계의 인식이 커졌습니다. 이는 디자이너 출신의 스타트업 대표가 많아진 덕분이기도 합니다. 배달의 민족을 서비스하는 우아한 형제들의 김봉진 대표는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입니다. 그는 ‘경영하는 디자이너’라고 명함에 적고 자신을 소개하죠. 지난 12월, 상장 첫날 시가총액 100조 원을 돌파하며 2020년 가장 성공적인 IPO로 주목받는 에어비앤비를 만든 브라이언 체스키(Brian Chesky)는 RISD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핀터레스트 창업자인 에반 샤프(Evan Sharp)는 창업 전에 페이스북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바 있습니다. 디자이너 출신 창업가가 업계에서 혁신적인 행보를 이어가며 비즈니스에서도 성공하는 비결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 있습니다.
- 디자이너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입니다.
- 디자이너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는 영감의 주체입니다.
두 번째 관점은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는 영감의 주체’로서 디자이너의 역할에서 출발합니다. 디자인에 대한 정의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스티브 잡스가 언급한 ‘how it works’입니다.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제품, 서비스, 비즈니스 구조에 모두 적용되는 사고방식입니다. 애초에 UX(User eXperience)는 외부에 드러나는 형태를 심미적으로 개선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더 쉽고, 유용하고 즐겁게 제품을 사용하도록 경험을 설계하는데 방점이 있습니다. 개선의 방향을 찾을 때 보여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고려하고 제품 내에서 솔루션을 찾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사용하는 상황, 연결된 서비스들까지 고려한다는 점에서 ‘플랫폼 비즈니스’에 강점을 보일 수 있는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언급한 대로 ‘how it works’로 정의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려면 영감의 주체로서 디자인은 기록을 활용해야 합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개의 직업만 갖기 않고 여러 직업을 가지며 살아가고, 그 어떤 시기 보다 더 풍부한 콘텐츠를 소비하며 자신이 소비하는 상품과 브랜드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패턴이 보이죠. 각자의 방식이 더 풍부해지는 시대에는 여러 리듬이 혼재하기 마련입니다. 디자이너는 이 흐름을 잘 관찰해야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작동 원리를 꿰뚫기 위해 여러 기록을 보고 자신의 해석을 더해 다시 기록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다움’을 강조하는 시대에서 각자 다른 ‘자기다움’을 이야기할 때 디자이너는 ‘우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가 성공적으로 개성이 다양한 개인들에게 ‘-다움’을 전달하려면 스스로 자기다움을 만들고, 집단으로서 자기다움을 형성할 수 있도록 ‘소속과 애정의 욕구’를 자극해야 합니다. 기록은 디자이너가 개인으로서 자기다움을 형성하는 과정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세계관에서 확장된 가치관이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우아한 방식을 공표하기에 이르면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될 겁니다. 내 생각을 꾸준히 기록하고 알리는 것만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비슷한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문자, 사진, 영상, 소리 모두 기록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기록하기에는 문자가 가장 비용 효율적입니다. 문자는 해석의 여지가 적은 동시에 가장 적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디자이너는 글로 기록하는 연습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